이헌재 금감위 위원장 강연(99.12.9) 내용

[보도자료] 1999-12-10 | 기획팀 정봉호

이헌재 금감위 위원장 강연(99.12.9) 내용

'97년 12월 3일 IMF와 긴급자금 지원협정을 체결한지 만 2년이 지났습니다. 지난 2년여의 기간동안 엄청난 질곡과 숨가쁜 변혁의 과정을 겪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가슴 졸이는 순간의 연속이었으며 많은 희생도 따랐고 값비싼 댓가도 치렀습니다.

아직 안심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지만 이제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는 벗어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한때는 기업이 줄지어 무너지고 직장인들이 거리로 쫓겨남에 따라 자칫하면 전국민이 빈민층으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부실을 과감하게 인정하고 이를 정리 가능한 형태로 전환하는 한편, 부실한 기업과 금융기관을 과단성 있게 정리한 결과,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회복하고 경기의 신속한 반등을 성취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부의 부채가 늘어났습니다마는 이는 위기발생 당시에 원래 있던 것이 현실화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구조조정에 힘입은 지난 1년간의 국민소득 증가분이 공적자금의 투입규모를 상회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 국민 모두가 힘을 합쳐 뼈를 깎는 노력을 경주한 결과이며, 특히 기업인 여러분들의 노고가 컸습니다. 잿더미에서 일어설 수는 있어도 빚더미에서 일어서기는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위기이후 지금까지 벌어들인 600억불이 넘는 경상수지 흑자는 한국기업의 저력을 보여 주는 것이며, 우리가 빚더미에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이었습니다.

사무실이 바로 이웃에 있습니다마는 자주 대면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 모처럼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제가 여기에 온다고 하니까 언론에서는 이제 재계와 금감위가 화해를 할 것이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런데 기실 화해를 하고 말고 할 계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기업에 문제가 있었다면 처음부터 시장과의 문제이었지 정부와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뿐 아니라 국내시장에서 믿음을 상실한 기업은 예외없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믿을 수 없다고 간주되는 기업이 늘어나고 건실한 기업과의 구분이 불명확함에 따라 시장이 거의 모든 기업을 외면하게 된 것이 위기의 본질입니다.

모든 기업을 살리려는 무모한 시도를 한다면 모든 기업을 잃고 말 것이며, 정부가 나서서 믿으라고 하여도 기업 스스로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시장이 따르지 않을 것이므로, 정부는 시장에서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알려 주고, 시장이 용인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시간을 벌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그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장은 본래 변덕이 심하고 인내심이 부족합니다. 국제금융시장은 특히 그러하며 한번 고개를 돌리고 나면 다시는 눈길을 주지 않으려 합니다. 갈 길은 멀고 험한데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바로 위기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시장은 지금 당장 무엇인가를 보이라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까닭에 언제까지 무엇 무엇을 하고 언제까지 또 무엇 무엇을 하겠다는 다짐을 함으로써 지금 당장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97년 여름 태국에서 시작되어 동아시아를 휩쓸고 러시아와 브라질을 거쳐 미국의 월 스트리트까지 흔들어 놓았던 위기를 경험하고 난 다음 21세기에는 신뢰의 게임이 전개될 것이라고 합니다. 시장의 신뢰를 얻는 것이 안정과 번영의 기본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시장의 신뢰를 잃으면 아무리 큰 기업이라도, 심지어는 국가도 쓰러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호주는 금번 위기의 진앙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소용돌이를 비껴갈 수 있었습니다. 호주의 수출품은 대부분 일본이나 아시아로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어 통화가치가 30% 가까이 하락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투자자들은 호주의 경제가 견실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호주달러가 약세를 보이는 시점이 오히려 호주에 투자할 적시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다른 나라는 펀더멘털이 튼튼하다고 아무리 주장하여도 믿지 않았고, 평가절하를 단행하면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자금을 인출하였지만 호주로는 자금이 오히려 유입되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호주는 시장의 신뢰를 받았고 다른 나라는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정실 자본주의, 연고주의, 정경유착, 불투명성 등이 문제의 원인으로 취급되기도 하였고, 아시아적 가치에는 근원적인 한계가 있다고도 하였습니다. 한 세대만에 소득을 열배나 증가시켰다고 해서 세계의 찬사를 받았던 경제가 갑자기 그것이 문제였다고 하면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시아적 가치에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재벌체제에도 공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한때는 경이적인 성장의 한 축이었을지 모르나 앞으로는 국제무대에서 통하지 않으며, 재벌체제가 아직도 필요하다는 주장은 시장원리 특히 기업경영의 투명성 논리에 압도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위기가 주의를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금융시장의 범세계적 통합화는 여전히 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금융 안전보장을 위한 국제금융의 새로운 질서형성은 지지부진한 상태입니다. 국제 금융시장은 원래 변덕이 심해서 빌미가 주어지면 언제라도 한국에 대한 태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 더구나 지진이 한번 발생한 곳에서 또다시 발생하는 것처럼 위기도 재발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겠다면 그것은 위기를 공식적으로 초청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러한 도전을 맞아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착시켜야 한다는 과제는 시대적 요청이며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업구조조정의 5대 과제는 한국경제가 신뢰를 회복하고 새출발을 하기 위한 필요조건을 정리한 것입니다. 그간의 노력의 결과 이제는 그 필요조건이 달성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형성한 단계에까지 이르렀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 중요한 사안인 까닭에 오늘 재계를 이끌어 가시는 분들을 모신 자리에서 5대 과제의 의미를 한번 더 되새겨 볼까 합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정부의 기업정책은 작년 1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께서 5대그룹의 총수와 국회식당에서 발표한 기본정책에서 바뀐 것이 없으며, 이는 위기극복을 위한 과제일 뿐 아니라 시대적 당위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조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개방적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국내외를 동일하게 취급해서 외국인에게 M&A를 허용하고 외국투자를 유치하면서 경쟁적으로 접근하겠다는 것이 큰 테두리입니다.

5대 기본과제중 첫번째는 기업경영의 투명성입니다. 이는 회계처리를 있는 그대로 엄정하게 하고 그 결과를 외부에 널리 공개해서 시장원리가 제때에 원활하게 작동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결합재무제표를 만들고, 공시제도를 강화하며, 감사위원회 제도를 도입하고, 소액주주와 비상임리사를 통해 전체주주를 위한 기업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장치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이 첫번째 과제는 다섯번째의 지배주주와 경영진의 책임강화와 연결되는 견제와 균형의 장치입니다.

두번째는 독립성의 원칙입니다. 지급보증 등을 통해서 계열기업 상호간에 서로 의존하는 체제나 혹은 내부거래를 통해서 서로가 내부의 수요 내지 지원을 유발시켜서 적당히 영업을 해 나가는 폐단을 끊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투명성의 연장선에 있는 원칙입니다. 투명하지 않으면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실제보다도 더욱 나쁜 것으로 알려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발전합니다. 그런데, 한 회사만 보아서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지만 지급보증이 많다고 하면 건실한 회사까지 못 믿게 되는 지경에 이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는 공정경쟁을 달성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요건입니다.

세번째가 재무구조 개선입니다. 제가 작년 4월초 금감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2년이내에 부채비율을 200% 정도 수준까지 내리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했을 때 사회 전체가 떠들썩했습니다. 현실을 도외시한 그런 이야기를 왜 꺼내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그때 그랬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고서는 국제경쟁에서 살아 남지 못한다고. 따라서 이것은 할 수 있다, 없다 또는 하기 좋다, 싫다의 문제가 아니라, 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존과 관련된 문제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재무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겠지만 시장심리 특히 국제 금융시장은 인내심이 없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하며, 그들은 대우에 빌려준 자신들의 자금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자기신용으로 자금을 빌리지 못한 6대이하 그룹은 좀더 시간이 있겠지만, 5대그룹은 한국경제의 얼굴이므로 5대그룹의 재무구조개선이 지지부진하다면 이는 곧 한국경제의 불안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국제사회가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우의 문제가 대폭발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여타 기업에까지 전염효과를 발생시키지 않을 만큼 재무구조개선에 가시적 노력을 기울여 주신 재계의 여러분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국제사회에서는 한국의 재벌이 주채권은행과 맺은 재무구조개선 약정이 차질없이 지켜지는지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예의주시하고 있음을 강조드립니다.

네번째는 주력기업을 중심으로 사업이나 기업구조를 재편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내부거래와 연결되어 있는데, 그룹의 수요가 있으니까 이를 생산하는 기업을 자회사로 가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거나, "남보다 먼저" 또는 "남이 하니까 나도" 하는 심정에서 여러 업종에 진출하였지만 모든 업종에서 경쟁력이 있지 않으면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1940∼50년대에 포드사가 자동차를 생산하다보니 철강업체한테 비싼 돈을 주면서 철판을 사오는 게 아깝고 억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드는 철강업에 뛰어들었다가 크게 실패합니다. 이로부터 포드사가 회복하는데 20여년 가까운 고통이 따릅니다. 왜냐하면 포드사가 철강에 들어가면서부터 철강 자회사가 가지고 있는 경쟁력에 관계없이 생산코스트에 따라 자회사의 제품을 사야 했으므로 시장에서 경쟁적인 가격으로 살 수 있는 여타의 자동차 메이커와의 경쟁에서 뒤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국제 무한경쟁 시대에는 세계수준의 기업만이 성장 발전해 갈 수 있습니다. 계열사의 유통 수요가 많으니까 운수업을 하고, 공장이나 사무실이 필요해서 건설업에 진출하다 보면 주력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그 분야에서 효율성이 뛰어난 기업의 진출을 가로막는 결과가 되어 나라 전체의 경쟁력이 훼손되게 됩니다. 과거에 아무 것도 없던 시대에는 모든 것을 새로이 만들어서 해야 했기 때문에 여러 분야에 진출하는 것이 불가피했을지 모르나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정부가 라이센스를 주고 경쟁을 제한하였으므로 렌트를 향유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국제경쟁의 시대입니다. 경쟁 상대는 세계를 통틀어 가장 저렴하게 생산하는 기업입니다. 여건이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변하지 못하고 과거의 행태를 구태의연하게 답습하면 타율에 의한 조정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위기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번째는 경영진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투명성의 원칙과 직결되는 과제이며, 외부로 드러난 지위나 형식에 관계없이 실질적인 결정권자에게 책임이 있고, 이사는 주주 전체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원칙입니다. 한편, 그 추진원칙으로서 세 가지를 천명하였습니다. 하나는 기업 스스로가 한다는 것으로, 기업이 자발적으로 이러한 변화에 적응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채권은행이 자기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용을 공여한 자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이 원칙에 따라 채권은행이 기업과 재무구조 개선약정을 맺어서 그 과정을 점검하고 이행을 촉구해 나가고 있습니다. 세번째로 정부는 5대 기본과제를 포함해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필요할 경우에 세제나 기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서 추진하며, 채권금융기관이 제대로 추진하고 있는지를 독려·점검한다는 것입니다.

정부는 이 5대 과제를 3가지 원칙에 입각해서 지난 2년간 일관되게 추진해 왔으며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모든 것이 시장의 원리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린 것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을 바꾸거나 막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부로서도 지키지 않을 수 없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댐을 막고 제방을 쌓아 일시적으로는 흐름을 조절할 수 있듯이 정부도 완급을 조절하고자 하였습니다마는, 자연의 순리를 거스를 수는 없는 것처럼 시장참여자들의 행동을 통제할 수는 없기 때문에 재계의 여러분들이 시장의 협조를 받을 수 있는 방안을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강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일각에서는 재벌해체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합니다마는 친재벌도 반재벌도 아니며, 굳이 말씀드린다면 가치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단지 각각의 기업이 투명하게 경영되고 독자적인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를 추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의 달성여부는 시장이 판정할 것입니다

시간이 없으므로 이 5대 과제는 서둘러 마무리지어야 합니다. 국제 금융시장이 의심이 많고 변덕이 심하다는 점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보다 중요하게는 국내시장에서 과거의 관행과 새로운 질서간에 마찰을 빚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제도가 새로이 도입되었으며 과거에 이미 있었으나 잊어버리고 있던 기본적인 제도들도 새롭게 작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도들이 본래의 취지대로 작동하면서부터 과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에 제약이 걸리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제도에 의해서는 일어날 수 없는 원인행위로 인해 발생한 과거의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새로운 제도 내에서 찾는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삼성의 삼성자동차, 현대의 강원은행, LG의 LG종금, SK의 SK증권 등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과거에라면 계열사들이 나서서 적당히 해결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까닭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이 더 잘 알고 있겠습니다마는, 내부에서 적당히 해결하지 못하고 합법적인 수단과 절차에 따라 공개적으로 해야 하며, 소액주주, 외국인 주주, 기관투자가 주주, 사외이사 등을 설득해야 하고, 잘못되면 대주주와 경영진에게 민형사상의 책임문제가 거론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과거의 문제는 하루 빨리 신속하게 매듭지어야 합니다. 대우와 투신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우리의 금융시장과 금융회사도 한 단계 더 성숙해 질 것입니다. 실패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인질상태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역할을 자임하게 될 것입니다. 인류역사상 최대의 workout이라고 일컬어지는 대우의 문제를 해결한 경험과 노하우를 지닌 우리 은행과 금융회사가 미래상환능력 기준에 의거하여 대손충당금을 쌓고 나면 더이상 머뭇거리지 않을 것입니다.

거액의 자금을 대출하였다고 해서 끌려 다닌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금에 대한 전액보장이 철회되고 나면 부실에 연루된 금융회사는 시장의 버림을 받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경영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정부가 직접 앞에 나서는 일은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그동안에는 당장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고, 시장안정도 되찾아야 하기 때문에 정부가 많은 분야에서 직접 앞장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간 금융시장의 건전성을 담보할 수 있는 각종 제도와 틀을 만들었으며, 그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는 원래 있던 제도와 새로이 도입된 장치들이 제대로 작동을 하는지 열심히 들여다 보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특히 시장에 정보가 올바르게 공급되고 원활히 유통되는지를 중점적으로 확인할 것입니다. 선의의 고객과 예금자를 보호하되 책임이 있는 자에 대해서 이를 엄정하게 물을 것입니다. 문제가 예상되면 시장에 알려 대비케 해야 하는데,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어느 정도인지를 분석하는 것은 바로 금융의 본질에 속하는 영역이며, 금융산업과 금융시장이 최선을 다해 개발해 나아가야 될 과제입니다.

금융감독은 시장의 자율과 창의가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재량의 여지를 줄여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원칙적으로는 모든 것이 자유롭고, 극히 예외적으로 제한을 한다"는 기본적인 원칙을 세워 나아갈 것입니다. 명백하게 금지되지 아니한 것은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풍토를 만들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제반 규정을 원점에서 검토해서 건전성과 투명성에 관한 조항은 그 취지대로 지켜가되, 경쟁을 제한하는 규제는 완화 철폐할 것입니다. 과거에는 금융기관의 퇴출이 어려웠으므로 진입을 제한하고 각종 규제를 가하였습니다마는 이제는 퇴출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활발하게 경쟁을 하는 역동적인 시장을 만들어 나아가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정부에서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이든, 이를 바탕으로 사업을 영위하는 사람이든, 또는 밖에서 비판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든, 우리 모두가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부주도의 획일적이고 일사불란한 군사문화에 푹젖어 있어서 관성의 잣대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이러한 것들을 떨쳐버려야 할 때 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율과 책임을 바탕으로 하는 시장경제를 만들어 나아가야 합니다. 혹자는 산업정책이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경제개발 5개년계계획을 만들고 전략산업을 선정해서 금융과 세제를 통해 지원하는 정책은 이제 수명이 다하였습니다. 단순히 노동과 기술을 최대한 동원하고, 이미 확립된 기술과 산업분야에 이를 쏟아부어 규모의 경제를 활용해서 선진국을 따라잡는 단계에서는 산업정책이 나름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지식기반경제입니다. 쉬임없이 다가와 불과 20여일 남은 21세기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기를 극복하고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조건이라 한다면, 21세기 지식기반경제에의 대응이 우리가 재도약할 수 있는 충분조건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는 한국이 그간 믿어왔던 규모의 경제에 입각한 장치산업의 부가가치는 WTO에 곧 가입할 중국의 도전이 없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저하될 것입니다. 한편 지식, 정보 등 소프트한 분야에서는 디지털적인 변화가 일어나, 기술주기가 빛의 속도로 단축되고, 경쟁의 영역과 방식에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시애틀에서의 회의에서는 별 진전이 없었지만 WTO 뉴라운드는 금융은 물론 서비스와 농업부문의 개방폭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입니다. 무역과 환경이슈를 연계시키려는 움직임도 강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전자거래가 보편화되면 기존의 무역과 금융관련 제도가 송두리채 바뀌어서 개별국가 차원의 산업정책을 무력화시킬 것입니다. 그런 반면 국경을 초월한 M&A로 인해 초거대 기업과 금융회사가 세계시장에서 지배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습니다.

21세기의 경제환경에 개발연대의 시각으로 대응해서는 어려움이 더욱더 가중될 것입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올 때도 큰 변화의 물결이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대응도 했습니다. 개화파도 있었고 갑오경장도 했습니다. 하지만 근대화의 물결을 제대로 타지 못하였던 까닭에 20세기 내내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21세기로 진입함에 있어서도 같은 오류를 범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이루어냄에 있어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제도를 만들어 그것을 제대로 작동시키고, 인프라를 구축하며, 인력 양성에 힘쓰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 봅니다. 국제경쟁의 최전선에 있는 기업의 역할, 특히 여기 모이신 최고경영자 여러분의 혜안과 기업가 정신의 발휘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순간입니다.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우선 금리가 한 자리수로 유지될 것입니다. 한때 재계에서는 국내금리가 국제수준으로 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비판하는 쪽에서는 한국기업의 금융비용이 높은 것은 부채비율이 높기 때문이며, 높은 부채비율이 금리를 더욱 끌어올리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바뀌었습니다. 시중에는 경제성장율이 높기 때문에 금리가 올라갈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을 하지만, 자금수급의 행태를 차분히 살펴보면 거시경제 모형 자체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기실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이 경영하는 기업이 자금의 대부분을 썼습니다마는 지금은 오히려 부채를 갚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자금이 많이 소요되는 업종인 석유화학, 철강, 자동차, 조선, 반도체 분야에서 유휴설비가 존재하며, 앞으로의 유망분야는 자본집약적이라기보다는 지식집약적인 분야가 될 것이므로 자금소요가 크지 않을 것입니다. 대우채권의 문제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장기 금융시장이 경색되어 있으나, 이 문제는 조만간 해결될 것이므로 금리의 하향 안정화는 시간문제이며,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정착될 것입니다. 고수익을 실현하여 경쟁력을 입증하고 시장의 신뢰를 확보하면 증시를 통한 자본조달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금융구조조정이 이루어지면서 한때 고금리를 쫓아 다니던 자금이 금리는 비롯 낮지만 건전한 은행으로 몰리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시장과 주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면 굳이 지배적인 지분을 확보하지 않아도 소신껏 경영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21세기에 펼쳐질 기업경영 환경의 변화는 새로운 도전인 동시에 무한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M&A나 자산인수방식 등이 보편화 되었으므로, 핵심력량을 확보한 기업은 파괴적인 벼랑끝의 경쟁을 거치지 않고 다른 분야로 핵심역량을 확대해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 것입니다. 반면 과거에는 물러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여러가지 제약요인이 있었으나 이제는 명예로운 퇴진도 가능해졌습니다. 시장의 신뢰를 받고 주주의 지지를 모을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의 한계를 벗어나 세계수준의 대기업을 가꾸어 낼 수 있습니다. 유럽의 금융후진국이었던 스페인이 한발 앞서 은행구조조정에 성공하고 수익력을 배가하여 자본조달에 성공한 까닭에, 포르투칼은 물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 은행을 인수하고 멀리 영국에까지 진출하는 위업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번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21세기의 물결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파라다임을 창출한다면, 한국이 세계속에 웅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것입니다. 오늘 모이신 재계 지도자 여러분들께서 앞장서서 이를 성취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