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 도입의 의미와 과제

[경제시론] 2010-03-08 | 전경련 경제본부 노사정책팀장 고용이

World Bank 노동시장 유연성 종합평가 순위는 183개국 중 150위, IMD 노사관계 생산성 순위는 57개국 중 56위. 우리나라 노사관계의 부끄러운 현실이다. 굳이 국제지표를 살펴보지 않더라도 연례행사로 반복되는 대형 사업장의 파업과 이에 따른 사회 전체의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지켜본 국민들은 우리나라 노사문화의 후진성을 피부로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

근로시간면제제도 도입의 의의

우리 경제가 한 단계 더 나아가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고질적인 노사문화의 후진성을 시급히 극복해야 한다. 작년 노동조합법 개정 과정에서 진통을 겪으면서 노조전임자 임금지급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근로시간면제제도를 도입한 것도 선진 노사문화 구축을 위해 노·사·정이 뜻을 모아 노력한 결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세계적으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과도한 노조전임자 수와 이들에 대한 사용자의 임금지급은 우리나라 노사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었다. 그런데 노동조합법의 개정에 따라 도입되는 근로시간면제제도는 노조전임자에 대한 사용자의 임금지급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되 교섭, 고충처리, 산업안전활동, 건전한 노사관계 발전을 위한 노조의 유지·관리 업무에 대해서는 근로를 면제해주고 해당 시간만큼 임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따라서 근로시간면제제도가 원칙대로 시행되면 노조전임자 수가 합리적으로 조정되고, 전임자의 활동도 조합원 권익 보호라는 노조 본연의 역할에 집중될 것으로 기대된다.
개정 노동조합법은 공익위원(5인), 경영계 위원(5인), 노동계 위원(5인)으로 구성·운영될 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가 근로시간면제 대상과 한도를 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노동부는 2월 말부터 운영되는 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가 노조전임자 활동 관련 사업장 실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법정시한인 4월 30일까지 근로시간면제 한도를 결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근로시간면제제도 도입 과정에서의 문제점

그러나 근로시간면제제도 도입 과정에서 일부 정치권과 노동계가 노사관계 선진화를 위한 디딤돌로 도입하려고 했던 근로시간면제제도의 취지를 훼손하는 모습을 보여, 근로시간면제 한도 결정을 앞두고 걱정이 앞선다.
경제계는 지난해 노동조합법 개정 과정에서 기존의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원칙을 양보하고, 근로시간면제제도를 도입하는 노사정 합의(2009.12.4)에 찬성했다. 그러나 그 이후 입법추진 과정에서 정치권의 요구에 의해 ‘건전한 노사관계 발전을 위한 노조 유지·관리 업무’가 타임오프 범위에 포함되었다. 금년 초 일부 정치권은 시행령에서 타임오프 활용인원 제한규정을 삭제하자고 요청했고, 노조전임자의 상급단체 활동을 타임오프 범위에 포함시키자는 주장도 있었다. 아울러 국민 세금으로 상급단체 전임자 임금을 준다는 말도 있어서 기업들이 매우 당혹스러워 했고, 이러다가는 이솝 우화에 나오는 낙타와 나그네 얘기처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었다.
시행령 개정 과정에서 타임오프 활용인원 제한 규정과 타임오프 대상에 상급단체 전임자 활동을 포함시키지 않는 원칙이 지켜져서 다행이지만, 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 심의과정에서 노동계가 강력하게 요구하고 일부 정치권이 이에 편승할 경우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 만약 근로시간면제제도가 노사정 합의정신과 달리 왜곡되어 시행될 경우, 근로시간면제제도는 실질적으로는 법 개정 이전처럼 사용자가 노조전임자에 임금을 지급하면서 그 절차만 복잡해지는 제도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전경련이 회원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도 기업들이 노동조합법 개정 내용 및 과정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응답기업의 72.6%가 개정 노동조합법의 시행으로 올해 노사관계가 불안할 것으로 예상했고, 최대 불안요인이 타임오프를 둘러싼 노사갈등이라고 응답했다.

우리나라 노사관계 선진화를 위한 시금석 마련해 주길

따라서 근로시간면제 대상과 한도를 결정하는 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의 역할과 책임이 막중하다. 작년 12월 4일 노사정 합의정신을 살려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원칙을 지키면서 건전한 노사관계 발전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근로시간면제만을 허용하는 것이 금년도 노사관계 안정은 물론 선진 노사문화 구축의 관건이다.
노사를 대표하는 위원의 수가 같기 때문에 공익위원들이 실질적으로 근로시간면제 대상과 한도를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공익위원들은 최초 적용될 근로시간면제 한도가 향후 우리나라 노사관계의 선진화 여부를 결정하는 시금석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최저임금위원회 등 기존의 노사정 공동위원회에서처럼 이쪽저쪽 사정을 모두 고려해서 적당한 타협점에서 근로시간면제 한도를 결정할 경우 우리나라 노사문화의 선진화를 위한 백년대계가 첫 단계부터 망쳐질 것이다.
이제는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패러다임도 변해야 한다. 사용자로부터 노조전임자의 임금을 받는 상황에서는 노조활동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노조 스스로도 느낄 것이다. 노조전임자 수를 줄이고 불필요한 경비를 줄이는 자구 노력을 하면 현재 노조비로도 노동조합을 충분히 운영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일부 노조에서는 스스로 노조전임자 수를 줄이고, 재정자립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조는 더욱 건강한 노조로 다시 태어나서 조합원 권익 향상이라는 노조 본연의 활동을 당당하게 수행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노동계도 이번 근로시간면제제도 도입을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노동조합을 건강하게 만드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노동계가 이번 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에서 실질적으로 노조전임자 임금이 보장되는 수준의 타임오프 한도를 요구하는 모습을 보일 경우 국민들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아울러 근로시간면제제도가 제대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기업이 잘해야 한다. 기업은 노동조합의 요구에 대해 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에서 결정된 타임오프 한도에 따라 원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기업이 기존 방식대로 적당히 타협해서 타임오프 한도를 넘어선 노동조합의 요구를 수용할 경우 우리나라 노사관계 선진화는 요원해질 것이다. 잘 알다시피 한 기업이 노조의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 경우, 이를 근거로 다른 기업 노조가 부당한 요구를 한다. 개별 기업은 다른 기업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근로시간면제제도 시행과 관련해서 철저하게 원칙적으로 대응해야 할 것이다.
아무쪼록 노·사·정이 진통을 겪으면서 합의한 결과물인 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가 우리나라 선진 노사문화 구축에 디딤돌이 될 수 있는 타임오프 대상과 한도를 결정해 주기를 기대한다.

(goh@fki.or.kr)

- 이상은 월간 전경련 2010년 3월호 [초점] 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