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 지속에 따른 영향과 우리의 대응

[경제시론] 2013-06-11 |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유승경

일본경제는 1990년대 초 거품경제 붕괴의 충격으로 금융 시스템이 부실화되면서 성장이 둔화되고 디플레이션에 빠져들었다. 이후 간헐적으로 회복의 기미를 보이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디플레이션의 수렁에 빠진 채 침체를 거듭하고 있다.

아베노믹스의 의도, 디플레이션 극복

아베노믹스의 목적은 일본경제가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 성장동력을 되찾는 것이며, 아베 총리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방안으로 공격적인 통화정책, 강력한 재정부양책, 장기적인 안정성장을 위한 구조개혁 등 세 가지를 제시했다.
이 중 가장 부각되고 있는 정책은 공격적인 양적완화를 내용으로 하는 통화정책이다. 일본경제의 최우선 과제인 디플레이션 극복에 있어서 통화정책의 역할에 거는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일본이 디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형성되어야 한다. 일본의 디플레이션을 낳은 근본 원인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있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일본인들의 비관적인 경제 전망으로 기대 인플레이션율이 20여 년간 하락한 데 있다. 때문에 아베 정부는 공격적인 통화정책을 통해 일본인들이 (향후 경기가 호전되면서 물가수준이 높아질 것이라는) 경제에 대해 긍정적 기대를 갖게 하도록 사력을 다하고 있다.
아베노믹스가 정책내용 면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일본은행이 1999년 디플레이션 극복을 위해 제로금리정책을 단행하고, 2001년 3월에 ‘양적완화’라는 이름을 처음 탄생시키며 대규모 국채를 매입한 이후 현재까지 수차례 실시했던 정책들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아베노믹스의 이론가들은 일본은행이 제로금리 유지와 양적완화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15년간 디플레이션을 극복하는 데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이들은 2000년 8월 일본은행이 제로금리정책을 중단한 것을 대표적인 정책 오류로 지적한다. 당시 일본은행은 제로금리의 부작용을 과도하게 우려하여 디플레이션이 종료되지 않은 시점에 서둘러 금리를 인상해 문제 해결을 어렵게 했다는 의견이다. 즉, 일본은행이 디플레이션보다 제로금리의 부작용을 더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잘못된 신호를 시장에 내보내 디플레이션이 더욱 심화되었다고 주장한다.
2000년 말 일본경제가 IT버블 붕괴로 다시 침체기를 맞이하자 일본은행은 2001년 3월 제로금리 정책을 재개하는 한편, 양적완화를 처음 단행했다. 이후 양적완화는 규모를 늘려가며 계속 시행되다 2006년 7월에 중단됐다.
아베 총리의 경제 자문들은 2006년의 양적완화 중단도 잘못된 결정이라고 평가한다. 일본경제가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연평균 2.3% 성장률을 기록한 것은 양적완화에 힘입은 것인데, 2006년 정책기조를 바꾸는 바람에 위기를 완전히 극복하는 데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다. 당시 일본은행이 양적완화를 중단한 것은 중앙은행의 독립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이었다는 평가다.

일본, 엔저에 유리한 국제적 여건 조성에 성공

아베 총리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규정한 법을 고쳐서라도 정책을 관철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하면서, 아베노믹스의 지지자인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를 일본은행의 수장으로 임명한 것은 소극적인 정책 추진이 지난 시기의 실패 원인이라는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지난 4월 4일 일본은행은 2년 이내에 물가상승률 목표치인 2%를 달성하기 위해 본원 통화를 2014년 말까지 현재의 2배로 늘리고, 목표 달성에 실패하면 한도를 두지 않고 본원 통화를 계속 늘릴 것이라는 계획을 내놓았다. 일본의 공격적 통화완화정책은 자본시장이 개방된 상태에서는 엔화의 가치 하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엔-달러 환율은 이미 100엔을 넘어서 103엔을 돌파하기도 했다.
최근 엔저 현상이 탄력을 받게 된 것은 시장 요인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본 경제외교의 성과라 할 수 있다. 5월 초에 열린 G7 재무장관회의에서 일본이 경쟁적 평가절하를 금지하고 있는 국제적 합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며 엔저정책을 용인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지난 4월만 해도 미국 재무부는 일본이 대외경쟁력 제고를 위해 엔화 환율을 타깃팅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해왔고, 독일 등도 시종일관 일본의 엔저정책을 비판해왔다.
그런데 G7 회원국이 태도를 바꾼 것은 일본이 치밀한 계획에 따라 관련국에게 반대급부를 제공하여 동의를 이끌어 냈기 때문이다. 엔저는 미국의 수출을 어렵게 만들지만, 엔저의 영향으로 투자자들이 미국 채권을 매수하게 되면 미국은 양적완화를 축소하더라도 현재의 낮은 이자율을 계속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엔저를 용인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은 올해 1월부터 매달 유럽안정기구의 채권을 매입하고 있으며, 4월에는 유럽금융안정기금의 채권도 매입했다. 일본이 유럽 재정위기의 구원자를 자처하고 나선 셈이다. 게다가 일본 재무상은 아시아 국가들의 채권을 매입해 채권시장의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4월 들어 일본인들이 외국 증권을 매수하기 시작한 것도 엔저를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 현상은 일본 투자자들이 엔저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일본 채권과 엔을 매각, 미국 채권을 매입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대응: 엔저정책 저지보다는 독자적 대책 마련 필요

일본경제는 15년에 걸친 디플레이션으로 성장은 정체하고 실업은 증가했다. 일본은 현재 매우 절박한 상황에 있다. ‘내가 살고 봐야 한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웬만한 주변국의 견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국익우선주의 정책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 경제는 일본의 엔저정책을 저지하는 데 역점을 두기보다는 독자적인 대응책을 마련하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산업 생산성 수준에 맞는 환율을 유지하면서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미 마련해 놓은 거시건전성 3종 세트, 즉 선물환 포지션 제한, 외국인 채권투자 과세, 외환건전성 부담금 기준 강화와 자본이동에 대한 추가적인 규제방안 검토 등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현오석 부총리가 환율 안정을 위한 시장개입 의사를 피력한 것은 우리 정부의 의지를 보여주는 시의적절한 대응이라 하겠다.

(seungyoo@woorifg.com)

- 이상은 월간 전경련 2013년 6월호 [초점] 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