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좌추적권, 또 다시 연장할 이유없다

[경제시론] 2003-09-04 | 신종익 신종익: 공정거래위원회가 내년 2월로 종료되는 계좌추적권을 또 다시 5년 더 연장하려 하자, 반대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반대 이유로 제시되는 것들을 보면 남용 소지와 기업의욕 저상(언론), ‘금융실명제법’과 상충(정부 부처), 법원이 발부해야 하는 영장주의에 위배(법학계) 등이다. 이 같은 문제만으로도 계좌추적권이 더 연장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계좌추적권을 더 연장해서는 안되는 근본적인 문제들이 있다. 먼저, 법적 안정성이나 정책 신뢰도를 저하시켜 법질서를 확립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지금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한 가장 큰 이유는 법과 원칙이 확립되지 않은데 있다. 그런데 준법에 앞장서야 할 정부 부처가 다른 부처나 각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법을 개정해서라도 권한을 유지하려고 하면, 누가 법을 지키려고 할지 궁금하다.

계좌추적권은 ‘97년말 외환위기 이후 부실회사 퇴출 등 기업구조조정이 워낙 급박하여 2년간만 행사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공정위는 2년후 법을 개정하여 3년간 더 연장했다. 그간 지원성 거래는 현저히 줄어들어, 공정위가 계좌추적권을 발동한 회수는 ’99년에 13회에서 2002년과 금년에 각 1회에 그쳤다. 계열사를 지원하기 위해 시장가격보다 낮게 팔거나 비싸게 사는 즉 ‘부당성거래’를 감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완벽하게 마련되었다. 계좌추적권은 2001년에 재연장할 때 시한이 또 다시 설정되었는데, 그 당시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이 발생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부처 권한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법을 개정하려고 하는 것을 알면, 누가 자신에게 유리한 법조항이 시한 도래로 인하여 종료될 때 순순히 받아들이려고 할까? ‘조세특례제한법’이나 중소기업관련법 등에 규정된 조세감면이나 보호장치가 시한이 만료되어 끝날 때 이해관계자들이 어떻게 나올 지는 예견하고도 남는다.

둘째, 계좌추적권으로 조사하려는 계열사간 거래는 형법상의 범죄와 같이 본질적으로 위법한 행위가 아니다. 공정위는 계열사간의 정상적인 거래는 문제시하지 않고, 계열사에 대해 낮은 금액으로 팔거나 비싸게 사주어 사실상 시장가격 차이 만큼 계열사를 지원하는 ‘지원성’ 거래만을 규제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간 공정위가 계좌추적권을 발동하여 금융회사를 통해 이뤄지는 부당한 거래를 적발한 것을 보면, 거래금액의 3.4%를 지원성 거래로 판정했다. 100만원 짜리 상품인데 계열사에 97만원으로 팔았고(103만원에 샀고), 은행에 예금했더라면 년 5%의 금리를 받았을 턴데 계열사에 4.83%에 빌려줬으니 부당한 거래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에서 상품이나 돈의 가격은 거래 시점이나 거래 상대방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어떤 백화점에서 100만원하는 TV를 그 옆의 백화점은 95만원에 팔고, 양판점에서는 93만원에, 인터넷 쇼핑몰은 90만원에 팔기도 한다. 금리도 마찬가지이다. 금융권간은 물론 은행간에도 금리차가 있고, 고객에 따라 차이는 더 벌어진다. 그래서 세법에서는 정상가격보다 ±30%의 차이가 나야 위법하다고 본다.

5대 그룹에 대한 공정위의 적발 내용을 보면 계열사간 거래를 통하여 계열사를 사실상 지원했다는 지원금액의 비중은 더 낮아 ‘98년 5월에는 부당내부거래로 적발된 전체 거래규모의 1.8%가 지원금액이었으며, ’99년 5월에는 지원금액이 0.6%로 뚝 떨어졌다. 시장에서 가격은 다양한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데, 정부가 나름대로 ‘정상가격’을 정해 놓고 그 범위를 벗어나면 ‘부당내부거래’라고 하여 제재하는 것은 넌센스(nonsense)이다. 이 같은 거래를 정부에서 규제하는 나라는 없다.

셋째, 공정위의 부당내부거래 규제는 다른 부처에서 그전부터 규제한 중복규제이다. 계열사간에 세금을 포탈할 정도의 거래는 법인세법에서 금지한다. 똑 같은 거래를 두고 다른 부처가 이미 규제하고 세금 등을 징수하므로 공정위가 추가적으로 규제할 필요가 없다. 공정위는 기업들이 금융회사를 통하여 우회적으로 계열사를 지원하므로 계좌추적권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금융기관을 통한 계열사 지원행위는 역시 보험업법 등에 의해 금지되며, 금융감독위원회는 은행, 보험, 투자신탁 등 모든 금융회사를 연계검사할 수 있고 계좌추적권으로 조사한다. 더욱이,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공정위가 적발한 3.4% 정도의 지원규모를 부당한 거래라고도 할 수 없다.

이밖에 상장회사나 은행 등의 금융기관이 대주주나 계열사와 거래하려면 이사회 의결을 받아야 한다. 공정거래법은 자산 2조원 이상의 기업집단 소속 계열사들이 자본금의 10%나 100억원 이상의 거래를 하려면 이사회 의결을 거쳐 공시하도록 규정한다. 보험업법 등 금융관련법은 계열사와 거래하려면 모든 이사의 승인을 받도록 하고 있다. 설령 시장가격보다 다소 차이가 나더라도 주주를 대신하여 이사들이 계열사와 거래하기로 의결한 사안에 대해 공정위가 간여해서는 안된다. .

‘96년말 공정거래법에서 부당내부거래를 최초로 금지한 이후, 계좌추적권을 발동하고 부당내부거래를 조사한지 5년이 되었다. 지금은 또 다시 계좌추적권을 연장하려고 하기 이전에 외국에서는 규제하지 않는 ’부당내부거래‘ 규제제도에 대해 평가할 때이다. 즉, 그간의 부당내부거래 조사의 성과가 무엇이며, ‘부당내부거래’라는 이름 때문에 대기업들이 이미지나 대외신용도 등에서 ‘부당하게’ 피해는 입지 않았는지, 어떻게 부당한 거래를 억제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아직도 관련제도나 부처간의 협조체제가 미비하다면 보완방안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시급한 과제는 조속히 법과 원칙을 확립하는 것이다. 계좌추적권은 3년전에 이미 법에 의해 시한이 정해졌으므로 내년 2월이면 폐지되어야 한다. 이 같이 법을 준수하는 것이 법질서 확립의 첩경이다. 만약, 부당내부거래가 다시 증가하거나, 이를 억제할 다른 방법이 없다면 그때 계좌추적권을 다시 도입하더라도 결코 늦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