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졸초임 삭감과 일자리 나누기

[경제시론] 2009-03-06 | 전경련 경제본부장 배상근

일자리가 걱정이다. 지난 1월 일자리는 작년 같은 달에 비해 10만 개 이상 사라졌다. 고성장 시대에도 고용 없는 성장(Jobless Growth)이 이슈였지만 올해에는 정부마저도 일자리가 20만 개나 감소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어 청년층 고용대란이 우려된다.
청년층 일자리 감소는 경기침체가 일차적인 원인이지만 우리 노동시장의 왜곡된 구조도 한 몫 하고 있다. 대학 입학률이 83%로 일본과 미국의 45∼50%에 비해 월등히 높아 취업시장에 대졸자들이 넘쳐나고 있는 가운데 우리 대졸자 거의 대부분이 공기업과 대기업 취업을 원하고 있다. 반면에 중소기업은 우수인재를 채용하지 못해 구인난에 시달리고 있다. 이처럼 취업시장에서 수급불균형이 나타나다 보니, 정부가 아무리 청년층 고용확대 대책을 세워도 효과를 보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최근 정부와 구직자들 모두가 대기업만 쳐다보면서 대규모의 일자리를 마련하라고 야단이다. 하지만 대기업의 신규채용 여력은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지난해 4월, 30대 그룹은 신규채용 목표로 전년도 6.6만 명에서 17.5% 늘어난 7.7만 명을 계획했다. 그런데 대기업의 일자리 창출에 대한 사회적 요청에 부응해 경제계는 당초 채용계획보다 10%나 더 늘리는 데 노력했다. 그 결과 30대그룹은 전년 실적보다 29.8%나 늘어난 8만 5,000명을 신규로 채용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실제 수요보다 많이 채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실물경제 침체로 연결되면서 고용여건이 매우 악화된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이를 반증하듯, 최근 전경련이 주요 기업을 대상으로 신규채용 계획을 조사한 결과 작년보다 무려 43%나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고용안정을 위한 경제계 대책 발표

이에 대기업들은 고용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고 최대한 인력채용을 확대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다가 대졸초임 삭감, 기존 직원임금 조정, 임원임금 반납 등을 통한 일자리 지키기/나누기라는 고육지책을 내놓게 되었다. 그런데 임원의 임금 삭감이나 성과급 반납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고 기존 직원의 임금 조정은 노사합의 사항이기 때문에 시급히 일자리 지키기/나누기를 추진하고자, 우선 대졸초임 삭감에 대해 논의의 초점을 맞추었다. 이에 따라 2월 25일 30대그룹 임원들이 모여 대졸초임이 2,600만 원을 넘을 경우, 회사의 경영여건에 따라 최대 28%까지 삭감하자는 큰 방향을 정했다. 물론 삭감률은 그룹별·기업별·업종별 경영여건을 감안하여 기업이 자율적으로 정할 계획이며, 삭감을 통해 조성된 재원은 고용안정이나 신규채용 및 인턴채용 확대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함께 기존 근로자의 임금 동결이나 임원들의 성과급 반납을 통한 고용안정 노력도 함께 지속할 계획이다.
앞으로 그룹별로 발표가 뒤따르겠지만, 한화그룹의 경우 회장과 임원의 급여와 상여금을 10% 반납해서 조성된 재원으로 300명의 인턴을 채용하겠다는 계획을 이미 밝혔고, SK그룹도 임원들의 성과급 반납으로 조성된 재원을 인턴 1,800여 명 채용에 쓸 예정이다.

생산성을 초과하는 임금수준 하향 안정 유도 필요

사실 대졸초임 삭감 주장은 경제계도 꺼내기 부담스러운 카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졸초임은 경쟁국들에 비해 너무나 높다. 경총 조사에 따르면, 2008년 우리나라 100인 이상 기업의 대졸 초임이 2,441만 원인데, 우리보다 1인당 GDP가 두 배나 높은 일본의 대졸초임이 불과 2,630만 원(일본 후생노동성 2008년 임금구조기본통계조사 결과, 2008년 평균환율 100엔=1098.72원 적용)이다. 또한 우리 대졸초임은 경제규모로 비교해도 월등히 높다. 2007년 1인당 GDP 대비 대졸초임은 일본이 72% 수준인 반면 우리나라는 128%에 달한다.
대졸초임이 높아진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금융공기업, 금융기관, 일부 대기업 등의 대졸초임 수준이 너무 높아, 이들과 우수인재 유치 경쟁을 벌여야 하는 기업들의 대졸초임까지 동반 상승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여기에 대졸초임이 높게 출발하다 보니 전반적인 임금수준도 과도하게 높아져 우리 기업과 국가의 대내외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해왔다.
따라서 이번 일자리 지키기/나누기를 위한 대졸초임 삭감 결정을 계기로 생산성 대비 적정 임금수준을 유지해 기업과 국가의 대내외 경쟁력을 높여 향후 기업과 일자리를 안정적으로 지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합의문의 구체적 이행을 위해 실현가능한 제안 내놓아야

일각에선 2월 23일에 있었던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민정 비상대책회의’의 합의정신을 깬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합의문을 보면, 경제계는 고용안정에 최대한 노력하고, 노동계는 기업의 경영여건에 따라 임금 동결·반납 또는 절감을 실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지금은 내 직장, 내 기업을 지키는 데 노사가 함께 노력해야 할 시기이기 때문에 우리 기업들은 고용유지를 위해 버틸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버티고 노동계의 이해와 양보도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결과다. 따라서 경기침체로 인해 세계적인 기업들이 대규모 인원감축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기업이 망하지 않고 살아남아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선 비용절감이 필수적인 상황이라는 점에 대해 이해를 구하고 싶다.
한편, 정치권과 노동계에서는 수백 조 원에 달하는 사내유보금 중 현금성자산을 털어 일자리 나누기에 쓰라고 한다. 대졸초임 삭감 같은 궁여지책을 모색하지 말고, 대기업이 금고에 쌓여있는 돈을 풀어 일자리 창출에 나서면서 ‘제 욕심만 챙기는 대기업’이라는 불신을 털어내라고 주문한다. 일견 그럴 듯한 제안이다.
작년 9월말 현재 전체 상장사 기준 사내유보금은 393조 원인데, 이 중 현금성자산은 약 18% 정도인 71조 원이다. 그런데 현금성자산은 기업이 통상 원재료·부품 구입, 수입대금 결재, 인건비 지급, 차입금 상환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보유하는 필수적인 운영자금이다. 잘 알다시피 기업의 운영자금은 함부로 쓸 수 있는 돈이 아니다. 일시적으로 운영자금이 없어 흑자 도산하는 기업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돈은 경영자들에게는 말 그대로 ‘종자돈’이다. 지금 당장 보릿고개로 배가 고프다고 해도, 다음해 모종을 위한 종자 쌀을 먹는 농부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기업들이 무리하게 운영자금을 헐어 일자리를 만드는 것보다 현금성자산을 효율적으로 잘 관리해서 흑자도산을 막아 일자리를 지키는 것이 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노사민정 비상대책회의 합의문에 들떠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지 않은 채 손 놓고 기다려서는 안 된다. 또한 아무런 대안도 없이 무조건 비난을 일삼는 자세도 버려야 한다. 지금은 일자리를 지키고 나누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을 만들고 실천하는 데 우리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할 시점이다.

- 이상은 월간 전경련 2009년 3월호 [초점] 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