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0 정상회의가 남긴 과제

[경제시론] 2009-05-08 | 중앙일보 국제부 차장 정재홍

4월 1일 런던 엑셀전시센터에 모인 주요 경제 20개국(G20) 정상들은 비장했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를 맞아 빈 손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결의가 역력했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에서 시작한 금융위기가 세계로 전염되고, 금융위기가 실물경제 위기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실업자가 속출하며 세계경제가 움츠러드는 상황에서 경제를 살리기 위한 국제적 노력이 절실한 상태였다.

과거의 실패 되풀이하지 않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회의가 열리기 전 “세계경제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위기 속에서도 각국의 이해관계가 달라 말만 요란한 잔치가 되풀이되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사실 76년 전인 1933년 런던에서 열린 세계경제회의가 그랬다. 66개국 정상이 모여 대공황을 극복할 방안을 논의했지만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후 각국은 제 살길을 찾아 나섰고, 자국 산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무역장벽을 쌓아 대공황의 고통을 깊게 했다.
G20 정상회의는 구호만 요란한 잔치로 끝나지 않았다. 세계경제를 살리기 위한 부양책과 무분별한 국제자본을 규제하기 위한 대책이 마련됐다. 오바마는 회의가 끝난 뒤 기자 간담회에서 “우리는 세계경제 회복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매우 생산적인 정상회의를 마쳤다”고 평가했다. 오바마의 공격적 경기부양 요청을 거부했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역사적 합의가 이뤄졌다”고 화답했다. 워싱턴 포스트(WP)는 “세계경제 정상회의는 별 기대를 하지 않기 마련인데 이번 G20 회의는 예외”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골 깊은 세계경제의 문제를 단 하루의 정상회담으로 해소할 수는 없다. 정상회의가 건너뛴 과제도 적지 않다.

IMF 등에 1조 1,000억 달러 추가 투입

G20 정상들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등을 통해 1조 1,000억 달러(약 1,430조 원)를 세계경제에 투입하기로 하는 등 6개항에 합의했다. 먼저 IMF의 재원을 5,000억 달러 더 늘려 7,500억 달러로 만들기로 했다.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동유럽과 개발도상국을 돕기 위해서는 IMF에 돈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가난한 나라를 지원하려고 IMF가 보유 중인 금을 판매해 재원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세계적 경제위기로 25년 만에 처음으로 움츠러드는 국제무역을 돕기 위해 2,500억 달러의 무역금융도 조성된다.
이와 함께 세계 금융규제도 강화됐다. 정상들은 금융안정포럼(FSF)을 금융안정이사회(FSB)로 확대해 세계의 자금흐름을 감시하기로 했다. 대형 헤지펀드에 대한 규제도 명문화했다.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아온 조세 피난처에 대한 규제도 강화된다. 정상들은 국제사회와 협조하지 않는 조세피난처를 파악해 규제한다는 데 합의했다. 또 은행의 비밀주의 철폐와 금융기관 경영진의 급료·보너스 규정 강화, 위기 재발을 막기 위한 금융시스템의 신뢰 회복 등 금융시장 규제도 한층 강화하기로 했다.
지난해 11월 워싱턴 G20 정상회의에서 합의된 보호주의 배격은 앞으로 1년간 추가 연장된다. 세계무역기구(WTO)는 자유무역을 저해하는 각국의 사례 등을 다른 국제기구와 조사해 분기별로 보고하기로 했다. 정상들은 선언문에서 “보호주의를 배격하고 무역·투자 촉진을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세계경제 회복까지 산 넘어 산

G20 정상들은 내년 말까지 경기회복을 위해 5조 달러를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구속력 있는 합의가 아니며, 그나마도 각국의 기존 경기부양책이 대거 포함된 액수다. 이로 인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런 결과는 G20 정상들의 이해관계가 달랐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대대적인 재정투자를 통한 경기부양을 요청했으며, 한국·일본·영국 등이 가세했다. 그러나 독일과 프랑스 정상들은 금융규제 강화가 더 시급하다는 당초 주장에서 물러서지 않아 진통을 겪었다. 유럽 국가들은 유럽의 사회안전망이 미국보다 낫고, 정부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3% 이하로 규정한 조치로 재정적자를 늘리는 데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미국과 유럽 간의 이견을 절충하는 선에서 미지근하게 타협했다.
또 금융위기를 불러왔던 미국 등 선진국 금융기관의 부실자산 정리방안도 마련하지 못했다. 이번 경제위기의 핵심에는 선진국 금융기관의 엄청난 부실채권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를 건드리지 않아 미봉책에 그쳤다는 분석이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는 “부자 나라들이 그들의 금융부문에 남아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외면했다”고 비판했다고 뉴욕 타임스(NYT)가 전했다. 부실자산이라는 폭탄의 뇌관을 제거하지 않아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가 여전하다고 본 것이다.
신설되는 FSB가 국제 금융거래에 대한 감독권을 갖지 못한 것도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국경을 넘어 거래되는 엄청난 규모의 단기자금을 규제할 수 없게 돼 앞으로도 선진국 금융기관의 실패가 개발도상국으로 전염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사이먼 존슨 MIT 경제학 교수는 “금융규제에 대한 부분은 합의 안 한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꼬집었다.
보호주의 배격도 선언으로 그칠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11월 15일 워싱턴DC에 모인 G20 정상들도 “보호무역 조치가 규정에 맞더라도 앞으로 1년간 투자와 상품·서비스 무역에서 새로운 장벽을 쌓는 것을 자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공수표가 됐다. WTO에 따르면 워싱턴 정상회의 이후 4개월여 만에 G20 중 17개국이 47개의 새로운 무역장벽을 쌓았기 때문이다. 런던 정상회의도 말과 행동이 일치할지 미지수다.

중국 등 신흥 경제국의 부상

G20 정상회담은 선진 7개국(G7)으로 대변되는 서구 선진국이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시대가 지났음을 상징한다. 미·영 등 서구 선진국은 2차대전이 마무리돼 가는 1944년 미국 브레튼 우즈에서 자기들끼리 만나 전후 국제금융체제에 합의했다. 이 합의로 IMF와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관들이 만들어져 전후 국제금융질서를 지배했다.
그러나 런던 회의에서는 중국을 필두로 인도·러시아·브라질 등이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은 2조 달러에 달하는 외환 보유고를 바탕으로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에 의문을 제기해 미국의 아픈 곳을 건드렸다. 또 홍콩을 조세피난처로 명시하려는 프랑스의 주장을 일축했다.
G20 정상들은 신흥 경제국의 높아진 위상을 반영해 2011년까지 IMF의 지분구조를 변화시킬 것을 약속했다. 중국은 IMF에 400억 달러를 추가로 출자하기로 해 발언권이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브라질·인도네시아 등도 이번 정상회담에서 개발도상국 지원책을 관철시켜, 서구 선진국이 세계경제를 독점하는 시대가 지났음을 분명히 했다.

(hongj@joongang.co.kr)

- 이상은 월간 전경련 2009년 5월호 [초점] 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