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한 돼지들’의 위기

[경제시론] 2010-03-08 | 매일경제신문 논설위원 장경덕

2월 24일 아테네 거리는 수만 명의 시위자들로 들끓었다. 공공·민간 부문 노조가 그리스 정부의 재정 긴축에 항의하는 24시간 총파업을 벌인 가운데 경찰과 시위대는 최루탄과 화염병을 주고받았다. 그리스 국민들은 재정위기가 끝날 때까지 오랫동안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걸 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재정 긴축은 그들이 각오한 것보다 훨씬 더 혹독할 것이다.
지난해 그리스의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12.7%나 됐다. 유럽 단일통화인 유로를 쓰는 16개국 평균(6.4%)의 두 배다. 나랏빚은 GDP의 112.6%에 이르렀다. 2001년 열두 번째로 유럽통화동맹(EMU)에 가입한 그리스는 동맹국들의 도움을 얻으려 나라살림을 급격하게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2012년 말까지 GDP대비 재정적자 비율을 3% 내로 줄인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동맹국들은 그리스의 방종을 쉽게 용서할 수 없었다. 흥청망청 돈을 쓰다 국가부도 위기에 몰린 이웃나라 사람들을 위해 피땀 어린 세금을 내야 한다면 어떤 국민이 선뜻 동의하겠는가?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 지도자들은 그리스 정부에 더 과감하고 실효성 있는 재정개혁안을 내라고 압박했다.
당장 4~5월에만 200억 유로의 빚을 갚아야 하는 그리스는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씀씀이를 더 줄이고 세금을 더 걷는 방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재정을 비롯한 경제운영 전반에 대해 동맹국들의 감시를 받는 수모도 겪게 됐다. 게오르게 파판드레우 총리는 “일부 주권을 포기했다”고 한탄했다.
격한 감정싸움도 벌어졌다. 그리스 부총리는 나치 독일이 2차대전 때 그리스에서 빼앗아간 돈을 돌려준 적이 없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독일은 유럽연합(EU)을 통해 그리스에 지원하는 돈이 얼마인데 그러냐고 쏘아붙였다. 나라 안에서는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하고 나라 밖에서는 국가부도의 위기를 넘기 위한 벼랑 끝 협상을 벌여야 하는 게 그리스의 서글픈 현실이다.
그리스뿐만이 아니다. 유럽 남쪽의 다른 나라들도 재정위기를 겪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금융시장과 언론에서는 나랏빚이 많은 이들 나라를 싸잡아 ‘PIGS’라고 부른다.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PIGS’의 ‘I’가 이탈리아냐, 아일랜드냐를 두고 의견이 갈리자 아예 두 나라를 모두 ‘PIIGS’로 묶는 이들도 많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이 발행하는 경제주간지 베리타스는 STUPID(스페인, 터키, 영국, 포르투갈, 이탈리아, 두바이)라는 신조어를 내놨다.
‘멍청한 돼지들(STUPID PIGS)’의 재정위기가 이들 나라 경제를 더욱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재정지출을 줄이고 세금을 더 거둘수록 수요는 위축되고 성장은 둔화될 것이다. 이는 다시 재정기반을 약화시키고 성장률을 더욱 떨어트리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더 무서운 건 글로벌 금융시장의 냉담한 눈초리다. 그리스 정부가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려면 독일 정부보다 3~4% 포인트나 많은 이자를 물어야 한다. 가뜩이나 유동성이 부족한 나라들이 투기자본의 집중 공격이라도 받는 날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정치인들은 벌써 자국 경제가 투기자본의 음모에 희생되고 있다는 말을 흘리고 있다. 정치인들이 고통스러운 개혁보다는 투기자본을 비난하는 데 더 열을 올리는 나라는 시장의 신뢰만 더 잃을 수 있다. 그럴수록 투기는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는 또 다른 차원에서 봐야 한다. 이들의 위기는 기본적으로 절제를 잃은 정부와 국민 탓으로 돌릴 수 있다. 하지만 유럽통화동맹이라는 위험한 경제적 실험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위기로 볼 수도 있다.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찢긴 유럽을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하려는 정치적 이상이 현실의 벽에 끊임없이 부딪히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1999년 유럽 단일통화가 출범한 후 유로권 16개국은 통화가치와 환율안정에 따른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누렸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쓰나미가 덮쳤을 때 무사히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유로라는 방패막이 덕분이었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통화주권을 유럽중앙은행(ECB)에 넘긴 나라들은 경제가 침체에 빠져도 마음대로 금리를 내리거나 돈을 풀 수가 없다. 통화가치를 떨어트려 수출을 늘리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유럽 전체의 재정을 관장하는 연방정부가 있어서 침체된 지역에 재정지원을 늘려주는 것도 아니다. 재정통합 없는 통화통합, 정치적 통합이 선행되지 않는 경제적 통합의 모순과 갈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인간이 설계한 모든 시스템이 그러하듯 유럽통화동맹은 결코 완벽한 체제가 아니다. 유로권의 가장 큰 위기는 ‘재정위기’라기보다는 ‘신뢰의 위기’라 할 수 있다. 그리스, 포르투갈, 이탈리아, 프랑스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사실상 분식회계로 재정적자나 부채를 줄이려 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는 것은 그 한 가지 예에 불과하다.
유럽이 과연 이번 위기를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는 정치적 의지와 역량을 갖고 있느냐는 미지수다. 그리스 경제는 유로권 경제의 40분의 1밖에 안 되지만 그리스의 재정위기를 어떻게 풀어가느냐는 유럽통화동맹과 유럽통합의 내적 모순의 극복 가능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시금석이다.
PIIGS 국가들의 재정위기가 계속되면서 소버린 리스크(sovereign risk)가 커지고, 각국이 자본조달 전쟁에 뛰어들어 국채 금리가 치솟고, 유로권 성장이 정체되면서 유로 가치가 급락하는 것은 최악의 시나리오다. 세계경제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유럽이 비틀거리면 글로벌 경제는 중요한 성장동력 하나를 잃고 글로벌 불균형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경쟁력이 떨어진 유럽이 보호주의 장벽을 쌓으면서 요새화하면 우리나라도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작년 우리나라의 PIIGS 국가에 대한 수출은 86억 달러로 총 수출의 2.3%에 불과했다. 하지만 EU 전체 회원국에 대한 수출은 466억 달러(12.8%)에 달했다.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외국인직접투자(FDI) 중 EU가 차지하는 비중은 2008년 54.1%(63억 달러), 2009년 46.1%(52억 달러)에 달했다. 지난 5년 동안 우리나라 무역흑자는 총 816억 달러였다. 같은 기간 EU에서 벌어들인 흑자가 867억 달러나 된다. 이처럼 중요한 파트너가 무기력하게 움츠러들면 우리에게도 큰 손실이다. 부자클럽 유럽이 이번 위기로 추락할지, 위기를 계기로 더 강해질지 지켜볼 때다.

(gdjang@mk.co.kr)

- 이상은 월간 전경련 2010년 3월호 [초점] 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