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엑슨-플로리오법'의 제정 필요성

[경제시론] 2007-06-10 | 전경련 기획조정실장 양세영

최근 국내 철강·전자·에너지 등 국가 중요산업에 대한 외국 투기자본의 적대적 M&A 위협이 고조되면서 ‘한국판 엑슨-플로리오법’ 제정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엑슨-플로리오법은 1988년 미국의 엑슨(Exon) 상원의원과 플로리오(Florio) 하원의원의 발의로 제정된 법으로서, 외국인 투자가 미국의 국가안보에 중대한 침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대통령에게 투자철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SK에 대한 소버린의 공격, 칼 아이칸의 KT&G에 대한 적대적 M&A 위협 등을 통해 외국 투기자본이 갖는 위험성은 충분히 드러난 반면, 기업의 경영권 방어를 위한 수단은 거의 확보되지 않아 주요 기간산업이 외국 투기자본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는 상황으로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
국내 중요산업을 외국 투기자본으로부터 방어하는 것이 시급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국민경제에 대한 기여도가 높은 중요기업의 경우 대부분 경영권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2007년 3월말 현재 시가총액 30대 기업 중 삼성전자, POSCO, 현대차, SKT 등 17개사, 10대기업 중 7개사가 외국인 지분이 최대주주 지분을 상회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현행 전기통신사업법 등 개별법을 통해 주요 산업의 외국인 주식취득 제한을 하고 있으나, 대상 업종이 제한적이며 대개의 경우 주식취득한도가 49% 수준으로 실질적 경영권 방어에는 한계가 있다. 실제 적대적 M&A는 전체 지분의 과반수 이상을 취득할 필요 없이 대상 회사 최대주주의 지분율을 상회할 정도만 확보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외환위기 이후 외자유치와 기업 구조조정을 위해 의무공개매수제도 및 외국인 주식취득한도 등 기존 경영권 보호장치를 폐지함에 따라 국내기업들은 적대적 M&A에 쉽게 노출되어 경영불안과 지분관리 부담증가 등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둘째, 이러한 경영권 불안은 과도한 자사주 매입을 유도하여 장기투자를 저해하기 때문이다. 뚜렷한 방어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경영권 불안을 최소화하기 위해 기업들이 유일한 방편으로 자사주 매입을 이용함에 따라, 최근 자사주 매입 상위 10개 기업의 자사주 보유금액이 약 23조 원에 달하는 등 국가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기업들의 장기투자가 위축되어 국가경제의 성장잠재력이 저하되는 문제를 유발하고 있다.
셋째, 국내 첨단산업의 기술유출을 방지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산업기술의 유출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 2007년 5월부터 시행되고 있으나, 국가로부터 연구개발비를 지원 받아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된 것만 대상이 되므로 민간기업이 독자 개발한 첨단기술은 M&A를 통한 유출로부터 보호받기가 어렵다.
넷째, 대부분 선진국은 자국의 핵심산업 보호를 위해 외국인 투자 규제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일본, 유럽 등 대부분의 나라는 외국자본의 자국내 핵심산업에 대한 M&A를 견제하는 장치를 두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미국의 경우 1988년 ‘방산물생산에관한법(Defense Production Act)’를 토대로 엑슨-플로리오법(Exon-Florio Act)을 제정함으로써 미국의 국가안보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외국인들의 미국내 기업인수합병에 대해 이를 제어할 수 있는 법적 수단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은 국가안보, 공공질서, 공중안전, 국민경제에 현저한 악영항 등을 이유로 외국인 투자를 사전심사하고 투자승인을 보류할 수 있도록 규정을 두고 있고, 경제계를 중심으로 자국기술 유출 방지가 원칙인 외환 및 외국 무역법을 미국식 엑슨-플로리오법화하려는 논의를 진행중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정부가 중요기업에 대해 황금주를 갖고 보호하고 있거나, 국방·철강·에너지 등 11개 부문은 외국기업이 인수시 정부의 거부권 행사가 가능하다.
이러한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지난해 12월 29일 ‘국가안보에 반하는 외국인 투자규제특별법’과 2007년 3월 15일 ‘국가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외국인투자 등의 규제에 관한 법률안’ 등 엑슨-플로리오법과 유사한 2건의 의원입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국가안보에 반하는 외국인 투자규제특별법’은 적용대상이 무기 등 군수물자 및 관련 핵심부품 제조 기업, 원자력, 정유 등 에너지 관련 기업,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는 첨단기술 보유 기업, 국민 생활에 필수적인 물품 생산 및 제조 기업, 사회통합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단을 보유한 기업으로 국한하되 공기업, 사기업을 구분하지 않았고, 조사위원회는 외국인의 자진조사 요청이나 직권으로 조사를 시작하며 대통령에게 필요한 조치를 건의하기에 앞서 잠정 조치를 취할 수 있고, 대통령은 외국인 등의 투자가 국가안보에 위해를 가할 우려가 있다는 신뢰할 만한 증거가 있는 경우 투자 무효명령, 투자 철회명령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가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외국인투자 등의 규제에 관한 법률안’ 역시 성격과 내용이 비슷하나 구체적 규제범위는 대통령령에 위임하고 있으며, 조사위원회가 외국인의 자진조사 요청과 대상기업 및 대상기업 주식의 10% 이상 소유 주주, 중앙행정기관장의 조사요청에 의해 조사를 시작할 수 있다.
한편, 정부는 이러한 경영권 방어관련 입법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외국인 투자 유치에 걸림돌로 작용할 새로운 규제의 도입이며, M&A 규제를 강화하는 것은 외국인 투자 자유화와 개방경제의 큰 흐름과 배치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대 입장은 개방 확대와 M&A 자유화를 지나치게 원론적인 관점에서 본 것으로, 선진국 대부분이 기간산업 보호를 위해 외국인 투자 규제를 시행하고 있다는 점과 국내 기업의 경영권 보호수단이 상대적으로 매우 취약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설득력이 약하다. 무엇보다 외국인 투자 위축의 문제는 크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 법안 모두 ‘조치의 보충성 조항’을 통해 다른 법률에 따른 허가·승인 등에 조치가 있는 경우에는 동 법안의 적용을 배제하도록 하고 있으며, 외국인 투자가의 충분한 소명기회 제공, 비밀유지 의무 부과, 투자자 불편의 최소화, 국회 보고의무 등을 통해 규제조치의 남용을 억제하고 있다.
또한, OECD 자본이동 자유화 규약에 대한 위배 가능성도 낮다고 본다. OECD 자본이동 자유화 규약 제3조는 일정한 경우에는 이 규약의 부속서에 기재된 유보업종에 속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회원국들이 외국인 투자에 대한 제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어 포괄적인 외국인 M&A 규제가 규약에 위배된다고 할 수 없다. 즉, OECD 규약에서 명시적으로 유보한 업종이 아니라도 규약의 해석상 국가의 공공질서와 국가안보와 관련된 사안은 외국인 투자를 사전심사하거나 투자를 제한할 수 있는 근거를 법령에 두는 것이 가능하다. 결국, 국가기간산업이나 국가안보에 위해가 될 우려가 있는 외국인 투자에 대해 이를 규제할 수 있는 합리적인 수준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글로벌 스탠더드에도 어긋난 것이 아니며, 외국인 투자를 위축시키는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국제화·세계화 시대를 맞아 외국인 투자는 경제발전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며, 적대적 M&A가 갖는 순기능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대외교역의 의존도가 높고 국내 자본력이 취약한 국가의 경우 외국인 투자가 갖는 의미는 더욱 크다 할 것이다. 그러나, 철강, 전자, 정보기술(IT) 등 한국을 대표하는 핵심기업들의 경우 대주주의 지분이 얼마되지 않아 외국 투기자본이나 경쟁기업의 먹잇감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고, 적대적 M&A에 대한 방어수단도 거의 없어 사실상 국제적 기업 사냥꾼들에겐 더 없이 좋은 M&A 대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외환위기 당시 지나치게 완화했던 M&A 관련 규정을 선진국 기준에 맞추어 정비함은 물론 철강, 정보기술, 전력 등 에너지, 방위산업, 항만 등 기간산업에 대한 적대적 M&A를 방어하기 위한 법적 장치 강구 차원에서 현재 국회에 계류중인 관련 법안이 조속히 통과되어야 할 것이다.

(ysy@fki.or.kr)

- 이상은 월간 전경련 2007년 6월호 [초점] 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