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집단소송제도의 실체법적 보완과제
-
[경제시론]2005-04-28 | 법무법인 율촌 미국변호사 김화진
증권집단소송제도는 두 가지의 목표를 가진다. 첫째는, 부실공시로 잘못 형성된 주가에 주식을 사고 팔아 손해를 본 투자자를 구제하는 것이다. 둘째는, 막대한 금액의 잠재적 손해배상책임 때문에 기업이 부실공시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하는 것이다. 즉, 증권집단소송은 피해자의 권리구제를 위한 사법적인 제도인 동시에 기업의 지배구조와 공시관행을 개선하게 하는 정책도구이다.
그러나 첫 번째 목표의 달성은 쉽지 않다. 회사 임원이 승진, 실적, 스톡옵션, 보너스 등의 이유로 부실공시를 하고 그것이 드러나 주가가 하락하고 집단소송이 발생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만일 주주의 25%가 원고라면 손해배상은 회사가 하는 것이므로 이 주주들은 회사 가치 하락의 25%를 분담하는 셈이 된다. 또, 패소나 화해로 주가가 추가로 하락하면 그 부담도 원고인 주주들이 고스란히 안게 된다. 나머지 75%의 주주들은 소송으로 발생하는 손해와 주가하락으로 발생하는 손해를 전부 부담한다. 반면, 소송이 끝난 시점에서 주주가 아닌 원고는 손실도 분담하지 않고 주가 하락으로 손해도 입지 않는다. 나아가,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인 임원은 대개 소송에서 피고가 되지도 않는다. 자금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 증권집단소송은 소송허가절차 단계가 主 戰場인데 여기서 피고가 지게 되면 보통 화해로 들어간다. 판결보다는 화해로소송이 끝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손해금액에 비해 화해금액은 대단히 작으며 약 10%에 달한다는 보고가 있다. 화해금 분배신청을 하지 않는 주주가 많기 때문에 분배신청을 한 원고들이 화해금을 다 나누어 가지고 끝나게 된다. 소송이 있는지도 모르는 투자자에게는 그야말로 ''당신이 잠든 사이에'' 다른 주주들이 내가 받아야 할 돈을 나누고 상황이 끝나는 것이다. 이 두 측면을 보면 증권집단소송제도가 피해자의 권리구제라는 본래의 기능을 하기는 대단히 어려움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증권집단소송이 ''정치적 목적''에만 활용되는 도구로 변질되지 않으려면 소송과 분배절차의 정비와 실체법적 측면의 정비가 대단히 중요한 과제다. 즉, 첫 번째 목표가 잘 달성되도록 해주어야 한다. 여기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실체법상의 어려운 문제들이 바로 인과관계와 손해배상의 범위 문제다. 물론, 이 문제들은 증권집단소송에 특유한 문제는 아니고 증권소송 일반의 문제다. 그러나 증권집단소송이 갖는 파급효과와 ''파괴력'' 때문에 새삼 관심과 정비를 필요로 하게 된 문제들이다.
소송이 발생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다수 포함된 집단의 모든 구성원이 부실공시로 손해를 입었다고 일률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논리적인가? 주식을 거래하는 이유와 패턴, 시점은 투자자들마다 제 각각인데 부실공시가 어떤 투자자의 손해로 연결되었음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과연 얼마나 많은 투자자들이 특정 재무서류나 공시를 보고 주식의 매매를 결정하는가? 한 회사의 주가하락이 부실공시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환경적, 사업적 이유 때문인지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거래와 손해간의 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에도 손해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부실공시로 인한 것인가?
이에 대해 우리 대법원은 "주식투자를 하는 일반투자가로서는 그 대상 기업의 재무상태를 가장 잘 나타내는 감사보고서가 정당하게 작성되어 공표된 것으로 믿고 주가가 당연히 그에 바탕을 두고 형성되었으리라는 생각 아래 대상 기업의 주식을 거래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해서 미국에서 발달한 이른바 ''시장사기이론''을 채택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이론은 회사의 부실공시는 회사의 주가에 반영되므로 투자자가 실제로 그 부실공시를 알지 못했다 해도 시장가격을 신뢰하고 거래했다면 그 부실공시와 투자자의 거래 사이에 거래적 인과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사기이론은 내부자거래 등 사건에서 미국연방대법원이 신뢰 내지는 거래인과관계의 입증을 완화하기 위해 인정한 이론이지만, 보통법상의 소송에서는 어느 주 법원도 채용하고 있지 않다. 현행 증권거래법의 해석론으로 시장사기이론을 적용하는 것이 타당한지 의문이며 이를 지나치게 확장해서 적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대법원은 손해액과 관련해서도 손해액은 분식결산 및 부실감사로 인해 상실된 주가 상당액이라고 보아야 하고 분식결산 및 부실감사로 인하여 상실하게 된 주가 상당액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분식결산 및 부실감사가 밝혀져 거래가 정지되기 전에 정상적으로 형성된 주가와 분식결산 및 부실감사로 인한 거래정지가 해제되고 거래가 재개된 후 계속된 하종가를 벗어난 시점에 정상적으로 형성된 주가의 차액 상당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하면서 이에 관해 원고의 주장, 입증도 필요 없다고 한다.
따라서 증권집단소송에서 피해자가 주장, 입증하여야 할 것은 사업보고서 등에 중요한 사실에 관한 부실기재가 있다는 것뿐이다. 미국의 경우 피해를 입은 투자자가 발행회사나 그 관계인에게 손해배상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피고의 고의(scienter)를 입증해야 하며(95년 개혁법에 따라 원고는 소장에 피고가 고의를 가지고 행동했다고 강하게 추정시키는 구체적인 사실을 특정해야 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 소송은 각하된다), 원고가 손해액 및 그 손해인과관계를 입증해야 한다. 손해배상액도 "원고의 거래가격"과 "시장에 올바른 정보가 공시된 이후 90일 동안의 종가평균"의 차액을 상한으로 한다.
증권집단소송이라는 파괴력이 큰 제도가 도입된 것을 계기로 미국에서 통용되는 이론이나 판례 등을 앞으로 보다 더 정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지난 4월 19일 미국연방대법원이 인과관계와 손해배상책임에 관해 종래 원고에게 지나치게 유리하게 되어 있던 법리를 크게 변경하는 판결을 내렸음도 참고해야 할 것이다(Dura 사건). 그리고 증권집단소송은 소송허가만 나더라도 기업의 입장에서는 패소한 것과 다를 바 없는 경우가 많으므로 새 판례만 기다리지 말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는 필요한 입법 조치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증권집단소송제도 도입을 계기로 실체법상의 문제들을 바로 잡을 수 있어야 할 것이며, 그를 통해 남소가 방지되고 일부가 아닌 전체 피해자의 권리구제라는 제도 본래의 목적이 달성될 수 있게 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