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등학교 역사교과서 인식의 문제점과 개선필요성

[경제시론] 2006-07-13 | 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 박효종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부끄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총체적으로는 자랑스러운 역사라는 일관된 주장은 이른바 ‘올드보이’들이 ‘팔불출(八不出)’처럼 자기자랑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얘들아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살았단다. 그러니 너희는 우리를 존경하렴!” 하는 식의 위압적이며 고압적인 자화자찬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혹은 ‘올드보이’들의 희생과 공적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젊은 세대들에게 늘어놓는 잔소리나 넋두리의 범주와도 더더욱 거리가 멀다. 다만 그것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도덕적 가치관이 어디에 있으며, 또 우리 삶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올바로’ 또 ‘정확하게’ 알아야한다는 지적 충정에서 나온 메시지인 것이다. 지금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질서에 입각한 번영의 삶을 향유하고 있지만, 그 근본이 무엇인지, 그 인과관계가 어떠했는지, 또 우리가 어떤 미래상을 추구해야 하는지, 한국의 후세대들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편향된 ‘기억의 정치화’ 현상

우리는 “국가는 주권과 영토, 국민으로 이루어졌다”는 고전적 명제에도 귀를 기우려야 하겠지만, "국가는 영혼으로 존재한다"고 설파한 어네스트 레낭(Joseph Ernest Renan)의 통찰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영혼으로 존재하는 국가공동체의 역사는 국민들에게 자존감과 정체성, 및 정신적 뿌리를 제공한다. 국민으로서의 한 개인은 국가의 영혼에서 도덕적 정체성을 추구하고 자신의 존재의미를 확인한다. 바로 이것이 교과서에서 ‘한국인들의 역사’가 ‘올바로’ 기록되어야 할 이유일 것이다.

국가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피땀 흘리며 일구어온 수많은 기념비적 사건들 가운데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망각해야하는지를 새로운 세대들에게 전해주는 ”기억의 사회화"야말로 교과서의 주된 기능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국의 기존 교과서에는 객관적인 ‘기억의 사회화(socialization of memory)’ 현상보다 편향된 ‘기억의 정치화(politicization of memory)’ 현상이 현저하다. 무엇을 잊고, 또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에서 왜곡된 사실을 기록하고 편향된 가치관을 설정함으로써 결국은 ‘역사의 권력화’ 현상을 부추키고 있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정치화된 기억’은 건국과 산업화는 물론이고, 특히 민주화를 다루는 교과서서술 부분에서 선명하게 나타난다. 민주화는 민주화세력이 주도한 민주화운동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서술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과서를 집필하는 사람들이나 그 교과서를 검인정하는 책임을 맡은 교육당국이 단지 ‘이념적으로’ 유용하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역사적 사실들을 마치 가게에서 물건을 고르듯이 임의적으로 취사선택해서 교과서에 실을 수는 없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교과서 검인정의 권한을 갖게 되는 정치권력이나 혹은 그와 유대감을 느끼는 지식권력이 기억의 제도적 메커니즘을 이용하여 후세대들에게 특정한 역사인식을 주입시키는 일은 각별히 경계해야 한다.

물론 교과서에서 이른바 "문화전쟁(culture war)"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한 국가공동체내에서 도덕적 가치나 국민의 정체성을 역사의 어떤 부분에서 찾을 것인지, 혹은 보다 더 궁극적으로는 국가공동체의 도덕적 가치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를 놓고 팽팽한 긴장과 격렬한 갈등이 발생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문제에 관한 한, 어떠한 서술도 객관성과 공정성을 100% 담보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떤 교과서라도 불균형적 서술이나 주관적 서술의 의혹을 말끔히 없앨 수는 없겠지만, 그것도 정도의 문제이다. 요즈음 사용되고 있는 기존 교과서의 기술을 보면, 객관적인 사실과 증거보다는 진보세력이 지식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 지대한 영향을 받아 민주화 과정이 과도하게 덧칠되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아래로부터의 역사"의 역동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나머지 과거 권위주의 성향의 지배자들의 권력의지와 억압기제를 과대 포장하는 한편, 피지배자의 저항을 과장되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의문이 있다. 기존 교과서에서 서술되고 있는 것처럼, 갈등과 대립, 단절과 저항운동의 범주로 민주화를 이해한다면, ‘하나의 국가공동체로서 전체 한국인이 공유하는 과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한국의 민주화를 설명하면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세력들만의 이야기로 일관한다면, 한국인 모두가 공유할만한 통일된 역사관이 부정되고 현재를 과거로부터 절연시키는 이탈적 파괴효과가 발생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결국 저항적 운동에 초점을 맞춘 ‘기억의 과잉 정치화’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끈을 잘라 버림으로써 우리의 후세대를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로 만들지나 않을까하는 우려를 낳게 되는 것이다.

후세대는 ‘잃어버린 세대’?

저항적 운동사로 윤색된 역사에서 ‘한국인들의 총체적 삶'에 대한 기억은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렵다. 단지 권력의 주변부에서 머무르다 권력의 중심부로 하루아침에 진입한 운동권주역들의 이야기만이 전해질 뿐이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식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권력과 영합하여 다음 세대에게 한 때 주변부였던 사람들의 역사관을 전수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의구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접근방식이 어떻게 현재 한국 교과서의 기본적 틀로 자리매김하게된 것인가?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국사회는 지난 60년간 건국과 6.25, 경제발전, 민주화 등의 급격한 사회변동을 겪으면서 짚어보고 넘어갔어야 할 과거사들을 제대로 조명내지 성찰할 여유를 갖지 못한 채 앞만 보고 숨 가쁘게 달려왔다. 이와 더불어 민주화과정을 겪으면서 정치권력과 지식권력 교체가 이루어지고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관한 격렬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여기에 한국 분단사를 새롭게 조명하자는 수정주의 진보사관이 편승하면서 대한민국이 걸어온 역사를 성토하는 교과서가 발간되기에 이른 것이다.

‘한 집단의 이야기’가 아닌 ‘한 국가의 이야기’

교과서 서술에 그러한 지적 근거를 마련해준 책이 있다. 1979년 한길사에 의해 발간된『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해전사』는 한국의 현대사를 비판적인 안목으로 “파헤치며”, “숨은” 진실을 “캐내는” 성찰적 역할을 자임하며 나타난 책이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당시의 지식사회에 널리 퍼져있던 군부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염증과 아울러, 이른바 “불신과 르쌍티망"의 정서가 현대사 서술에 광범위하게 스며들게 된 것이다. ‘르쌍티망(ressentiment)’이란 단순하지만 아주 강력하고 사납기 짝이 없는 회한의 감정, 즉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격분(激憤)’의 감정이다. 특히 386 세대의 ‘르쌍티망’은 자신들이 그동안 정치와 사회의 주변부에서 소외를 곱씹고 학대와 억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억울하다는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그보다는 훨씬 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싶다는 욕구에 뿌리를 둔, 기존역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 즉 ‘자학사관(自虐史觀)’이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회한의 감정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계승발전’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와 ‘단절’, ‘지양’의 대상으로 삼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래서 기존의 ‘이스태블리시먼트(establishment)’를 부정하고 기존의 역사관도 무너트리고 싶어 했다. 물론 한국의 역사에서 ‘부(負)의 유산’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광복직후의 분단자체가 모순인데, 우리가 광복 60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를 ‘압축적으로’ 번영시키는 과정에서 어떻게 모순이 없었겠는가.

그러나『해전사』에서 나타난 ‘르쌍티망’이 탄력을 받으면서 국가공동체가 공유해야할 집단기억에 관한 연구도 정치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억의 정치화’ 현상은 한국인들의 총체적 삶을 다루어온 전통적인 역사관에 도전장을 내고,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역사까지 파헤치면서 ‘단절’과 ‘지양’을 강조하는 지적 분위기를 주도한 것이다.

이제야말로 근,현대사 교과서가 균형을 찾아야 할 때이다. 교과서에서 다루어지는 역사는 ‘한 집단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국가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공동체 구성원 모두나 다수의 가치관과 이익에 부합되는 서술로 근,현대사가 구성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공동체의 기억’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