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의 배임죄 공포,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경제시론] 2012-12-17 | 전경련 경제본부 기업정책팀장 이철행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애매모호한 법안의 대명사, 배임죄!
  2011년 8월 김쌍수 전 한국전력 사장은 전기요금을 올리지 않아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소액주주들로부터 2조 8,000억 원의 손해배상소송을 당했다. 정부의 반대로 전기요금 인상이 불가능했다고 소명했지만, 이 사건은 법원까지 갔고 김 전 사장은 사임했다. 이런 여파 때문인지 후임 김중겸 사장은 전기요금을 10% 인상하려고 지식경제부와 끊임없이 힘을 겨뤘다. 전력 구매요금 산정이 잘못됐다면서 전력거래소 등을 상대로 4조 원대의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준비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김 사장의 과욕이라고 말하기도 했으나, 배임추궁을 의식한 고육지책이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이는 경영자들이 배임죄에 얼마나 취약하게 노출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우리나라의 배임죄 구성요건은 너무 광범위해
  배임죄는 독일·일본에도 존재하나, 우리나라는 배임죄 구성요건이 광범위하여 가장 쉽게 배임죄가 성립된다고 많은 법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다. 독일의 배임죄는 1532년 카로리나 형법전에 처음 등장한 이후 1871년 독일 제국형법으로 이어졌으며 여기에는 ‘후견인,관리인, 재산보호인, 재단관리인, 계량인, 측량인, 부두하역인’ 등 행위자를 명시해 배임죄를 제한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현재는 배임죄 주체를 ‘법률 또는 관청의 위임, 법률행위 혹은 신임관계’로 제한하고 있다.
  일본은 명백히 손해를 가할 목적이 있어야 배임죄가 성립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형법에 ‘타인의 사무처리자’로 규정해 그 범위가 넓고, 손해를 가할 목적이 없어도 경영상 불가피한 선택 또는 장기적으로 회사에 보탬이 되는 결정이라도 일단 금전적 손실이 발생하면 배임죄를 피해가기 어렵다. 미국은 배임죄 조항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우편사기죄가 유사한 기능을 한다.
  배임죄의 본질은 배신이며, 국가의 형벌권 행사 이전에 민사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항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단순히 비윤리적인 행위와 형사처벌을 해야 할 행위를 구분하는 것도 어렵고, 구성요건이 광범위하기 때문에 어떤 사안에서 배임죄가 성립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배임죄로 기소되더라도 무죄로 판결된 경우가 많은데, 다른 범죄에 비해 무죄율이 5배나 높다.
  최근 문제가 되는 것은 대선 후보들이 모두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형량을 강화해 기업인 범죄에 대해 집행유예가 불가능하게 만들겠다’고 공약하고 있는 점이다. 의원입법 발의안에 따르면, 배임액이 5억~50억 원이면 처벌이 현행 3년 이상 징역에서 7년 이상 징역으로 강화된다. 이렇게 되면 법관 재량으로 형기를 절반 감형해도 집행유예가 가능한 징역 3년 이하로 내려갈 수 없다. 배임액이 300억 원 이상이면 무기 또는 15년 이상의 징역을 규정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형법에서 정한 살인죄가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임을 감안하면 횡령·배임죄가 살인죄보다 더욱 중하게 처벌되는 셈이다.
  이렇게 된다면 기업투자 위축과 기업가정신이 후퇴되는 것은 명약관화다. 한국의 기업가는 앞으로 5억 원 미만의 기업경영활동만 해야 한다. 배임죄 처벌을 받더라도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는 수준이 그 정도이기 때문이다. 만약 배임액이 300억 원을 넘으면 오랜 기간 형을 지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경영상 의사결정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며, 되도록이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기업인을 배임죄 공포에 계속 노출시킬 것인가
  그렇다면 기업인을 이 같은 배임죄 공포에 계속 노출시킬 것인가?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1985년 프랑스 대법원에서는 기업인이 배임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로젠블룸(Rozenblum) 판결이 나왔다. 동 판결의 내용은 그룹 계열사의 이사가 기업집단 전체의 경영에는 이익이 되지만, 당해 계열사에는 손해가 되는 경영행위를 한 경우의 면책범위를 제시했다.
  재판부는 그룹경영의 공통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허용되는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관계 회사들의 경영활동이 상호 긴밀하게 연결됨으로써 기업집단의 구조가 확립돼 있어야 한다. 즉 계열사 간의 경영활동이 긴밀하게 연관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둘째, 경영위기 시의 일시적 지원 차원을 넘어서 기업집단 전체의 공통이익을 추구하는 일관된 경영전략이 존재해야 한다. 계열사 간에 지분출자, 지급보증, 거래납품 등으로 연계돼 그룹단위의 통일된 경영전략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 관계회사들과의 거래관계로부터 발생하는 이익과 부담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관계사 간의 물품 및 서비스 거래가 합리적 가격에 이루어져 한쪽 계열사가 일방적인 이익이나 손해를 보는 경우는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프랑스 대법원의 로젠블룸 판결은 그룹 계열사들이 열거한 3가지 조건을 갖추고 내부거래나 출자 등을 할 경우 경영진에게 배임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것을 명문화했다는 점에서 유럽의 기업인 재판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그룹경영에서 계열사 간 거래 등에 대해 최고경영자(CEO)의 폭넓은 자율행위를 인정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로젠블룸 판결로 프랑스 CEO들은 배임죄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소신껏 경영활동을 하게 됐다.

기업가의 경영판단 원칙을 명문화해야 할 것
  한편, 미국과 독일은 경영판단의 원칙을 도입해 배임죄 공포에서 기업인들을 벗어나게 하고 있다. 미국은 판례법에서 경영판단의 원칙을 도입해, 회사의 이사나 임원이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경영적인 판단에 따라 임무를 수행한 경우 비록 그 판단이 후일 회사에 손해를 발생시킨 원인이 되었더라도 이사의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 독일은 경영판단의 원칙을 주식법 제93조에 규정하고 있다. 일본과 우리나라에는 아직 도입되어 있지 않다.
  우리나라도 미국, 독일, 프랑스처럼 경영자들이 소신껏 경영활동에 매진할 수 있게 경영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 그 방안중 하나는 기업가의 경영판단에 대해서는 상법상 특별배임죄의 처벌을 면하게 하는 것이다. 상법 제382조(이사의 선임, 회사와의 관계 및 사외이사) 2항에 ‘이사가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회사의 이익을 위하여 경영상의 판단을 한 경우에는 의무의 위반으로 보지 않는다’는 문구를 삽입하여 경영판단 원칙을 명문화해야 할 것이다.

(hank0327@fki.or.kr)

- 이상은 월간 전경련 2012년 12월호 [초점] 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