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팽창과 시장경제
역대 정부들은 내놓고 큰 정부를 지향하지는 않았다. 최소한 큰 정부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은 의식하였다. 그러나 현 정부는 몇 달 남지 않은
지금도 강력한 정부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 기세가 꺾일 만한데도 말이다. 사실 이 정부는 정권 내내 시장경제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운
인식을 드러내었다. 한편으로는 시장경제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경제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또는 균형과 형평을 위한다는
이유로 정부의 시장개입을 당연시하였다.
국정감사 자료에 의하면, 현 정권은 지난 5년 동안 끊임없이 관료조직을 뜯어 고치면서 장·차관을
32%, 1~3급 공무원을 27% 늘렸으며, 그 예하 공무원도 무려 7만 명 가까이 늘렸다. 국민은 이를 위해 추가적으로 5조 원을 더 부담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416개나 되는 각종 중앙부처 위원회를 만들어 여기에 2006년 4,329억 원을 집행하였다. 2002년 1,007억
원에 비하면 무려 4배가 넘는 금액이다.
게다가 정부는 올해보다 7.9% 늘어난 내년도 예산안을 확정하였다. 6년 만에 가장 높은
예산증가율이다. 국가 빚은 재정적자의 지속으로 인해 임기 시작할 때에 비해 두 배 이상 증가하였다. 현 정부는 임기 내내 의욕이 넘쳤으며 아직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많은 정부임에 틀림 없다. 대한상공회의소가 현 정부를 '작은 정부를 거부한 최초의 정부'라고 지칭한 것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정치가, 관료들의 사적 이익 추구는 규제강화와 예산확보 통해 나타나
대학 강단에서는 가계와 기업, 그리고 정부를
3대 경제주체라고 한다. 이들이 마치 경제행위를 하는 주체인 양 말이다. 그러나 행위는 결코 조직이 아니라 인간 개인에 의해 행해진다. 이 점을
분명히 할 때, 우리는 정부를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다. 정부는 공익을 위한 조직일지 모르지만, 또는 최고 당국자가 진정으로 공복의 자세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 실제의 행위는 그 아래의 정치가와 관료들이 행하는 만큼 그들의 행위는 사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인다. 단지, 견제와 감독
시스템이 그들의 사적 이해를 관철시키지 못하게 할 뿐이다. 그러나 그 견제와 감독 역시 인간에 의해 수행되는 만큼 느슨한 틈은 언제나 열려
있다.
정치가와 관료들의 사적 이익 추구는 규제강화와 예산확보를 통해 나타난다. 규제는 어떤 형태이든지 기업과 개인들로 하여금 정치가와
관료들에게 접근하도록 만들며, 예산확보와 그 규모의 증대는 그들 밑에 사람들을 모이게 한다. 이것은 규제와 예산이 그들에게 권력을 쥐어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은 결코 규제와 예산의 끈을 쉽사리 내놓으려고 하지 않으며, 규제강화와 그 내용의 잦은 변경, 그리고 예산규모의 확대가
관료사회의 일반적 속성이다. 이것은 이들에게 접근하지 못하는 기업가와 일반 시민들에게 곧바로 차별적 피해로 나타난다. 우리처럼 緣과 脈을
중요시하는 사회에서 이러한 차별로 인한 피해의 정도는 심각하다.
정의는 차별과 관련되어 있는 만큼 이러한 차별을 줄여 나가는 것이
정의구현의 출발점이다. 규제강화와 공무원의 증원, 그리고 이에 따른 예산증액이 분배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차별
발생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규제의 틈을 이용하고 정치가와 관료에게 한 번이라도 더 접근하려는 자들의 시장적응력은
정부가 연민을 갖고 도우려는 계층보다 훨씬 뛰어나다.
균형과 형평을 위해서 도입된 각종 정책이 오히려 더욱 차별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면
정부로서도 얼마나 황당한 일이겠는가? 이런 황당함은 이한구 의원의 금번 국정감사 자료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다.
현 정부가 들어선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부동산 양도에 의한 차익이 160조 원에 이른다고 한다. 국세청에 신고되지 않은 차익과 아직 거래되지 않은 것들까지
모두 포함한다면 그 차익은 실로 엄청난 금액일 것이다. 이러한 차익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겠는가? 이것의 상당 부분이
프리드먼의 비유처럼 도자기 가게에 뛰어든 황소같이 정부가 시장을 마구잡이로 흔들어 놓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면, 이들이 어찌 정부에 대한
원망과 억울한 감정을 지니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규제완화와 예산규모의 절대적 삭감을 주창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정부가 시장에서
황소같이 날뛸 수 있는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길이다.
우리가 시장을 신뢰하는 것은 우리의 사회적 기본가치인 자유와 정의,
안전, 그리고 진보를 시장만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나마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시장은 교환 당사자 간의
자발적인 합의를 상징하는 말에 불과하다. 시장은 무엇을 의도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시장에 실패니 성공이니 하는 말을 붙이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따라서 정부의 시장개입 이유를 시장실패에서 찾는 것은 논리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 국가의 번영은 정부가 개인의 신체와 재산을 보호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 범위를 벗어날 때 국가는 개인에게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행사해 왔다는 것이 우리의 역사적 경험이다.
시장의 역동성은 규제와 간섭 줄여나갈 때 기대할 수 있어
시장에는 균형으로 수렴하려는 힘과 그 균형을 깨려는 힘이 항상 존재한다. 시장 참여자들이 앞선 자를 따라 가려는 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전자의 힘이 발휘된다면, 경쟁자들을 추월하려는 혁신자의 역할은 그 균형을 항상 깨려는 경향을 갖게 한다. 시장경제가 역동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시장참여자들의 이러한 조정과 혁신의 동기가 활기 있게 넘쳐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들에게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보장되어야
한다. 자유는 지식의 모방과 확산뿐만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발견케 하여 우리 사회를 진보케 하는 원동력이다.
역설적으로 현 정부의 화두는
혁신이었다. 역대 정부 중 현 정부처럼 혁신이란 용어를 좋아한 정부는 없었다. 기업도시 및 혁신도시의 건설, 혁신 클러스트 사업 추진, 정부혁신
등 이 정부는 무언가를 얼마나 바꾸고 싶어 했는지를 알 수 있다.
혁신이란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을 달성해야 한다고 닦달할 때 나타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자율성이 확보된 상태에서 조금씩 그리고 우연히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현 정부가 혁신을 핵심전략으로 삼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균형과 형평을 정책기조로 삼은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시장에 더 많은 자유로움을 보장해주고 규제와 간섭을 최대한 줄여나가는 것만이
혁신을 통한 시장의 역동성을 기대할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