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비준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경제시론] 2008-05-13 |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장 최병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된 지 1년이 흘렀다. 전문가들은 지난해 4월 2일 극도의 긴장감과 기대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타결된 한미 FTA가 한미 양국의 동맹관계를 격상시키고 동북아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도모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될 것으로 예측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한미 FTA는 아직 한국과 미국 어느 곳에서도 비준되지 않고 있다. 관세인하와 비관세장벽 제거 혜택은 서류 위에서 잠자고 있다. 작년 9월 7일 한미 FTA 비준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되었지만, 대선후보 검증공방 속에 실종되어 첫 관문인 통일외교통상위원회의 문턱조차 아직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 앞에 선 17대 국회

17대 국회는 한 달 내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이명박 대통령은 임시국회를 열어서 FTA 비준안을 처리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지만, 야당으로 자리바꿈한 노무현 정권에서의 여당의 입장이 정리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비준안 처리 여부는 불투명하다. 국회가 비준동의안 처리에 미온적이거나 부정적인 이유는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협상과정에서의 의혹을 국회차원에서 먼저 검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난해 9월 7일 정부가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한 날, 70여 명의 국회의원들은 발빠르게 국정조사를 요구했다. 이들의 국정조사 요구는 다분히 정치공세인 면이 강했다. 왜냐하면, 한미 FTA 협상 기간 내내 정부와 협상단은 국회의 집중 모니터링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통일외교통상위원회라는 소관 상임위를 제쳐두고, 국회특위를 발족시켜서 한미 FTA 협상기간 내내 협상과정을 일일이 보고받고, 검증해 오지 않았던가. 협상관련 자료공개, 정보열람권을 가지고 있던 특위가 아니던가. 특위 소속 어느 위원의 보좌관은 협상문건을 유출시켜 검찰에 기소까지 되기도 했다. 국정조사 요구가 시간 끌기, 시선 끌기의 구태라는 것쯤은 유권자들은 다 안다.
둘째, 정부가 마련한 피해대책이 불충분하다는 주장이다. 과연 그럴까. 보상대책 불충분 타령은 흘러간 유행가이다. 2003년 한·칠·FTA 국회비준 과정에서 우리는 국회 회의장을 무력으로 장악한 ‘농촌당’ 의원들의 광폭한 질주를 목격한 바 있다. 칠레 농산물이 밀려와 한국 농업이 죽는다고 주장하던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한미 FTA 협상기간 내내 IMF 100배 이상의 쓰나미가 밀려온다던 반대구호는 협상이 타결되고 내용이 공개된 이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타결된 협상내용이 한국과 미국 양국에게 균형을 맞춘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평가와 여론이 대세에 밀려난 것이다. 분석이 받쳐주지 않는 막연한 피해주장은 청산되어야 할 구태이다. 자신의 지역구 생산자의 비효율성을 자신들의 혈세로 땜질하는 것에 납세자들은 분노한다.
셋째, 한국이 먼저 비준할 것이 아니라 미국이 비준하고 난 이후에야 비준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한미 FTA가 발효하려면 한국과 미국에서 모두 비준동의를 받아야 한다. 미국 행정부는 아직 한미 FTA 비준동의안을 미국 의회에 상정하지 못하고 있다. 보호무역성향의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면서 한미 FTA로 인해 미국의 자동차산업이 피해를 입는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한국이 미국 쇠고기 수입을 통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비준동의안 상정은 부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선 레이스가 열기를 더해가고 있는 미국의 경우, 이번 여름을 넘기면 한미 FTA 의회 비준은 부시 행정부에선 처리가 불가능하다. 2009년으로 넘어가게 된다.

쇠고기 분야 논의의 진전

이런 상황을 반전시킨 것은 쇠고기 분야 논의의 진전이다. 한국은 국제수역사무국(OIE)이 지난해 5월 미국이 광우병을 통제하고 있는 국가라는 결정에 따라, 지난 4월 18일 미국으로부터 30개월 미만의 소의 경우에는 특정위험물질(SRM) 2개를 제거한 모든 부위, 미국 정부의 강화된 사료금지조치가 공표되면 30개월 이상의 소는 SRM 7개를 제외한 모든 부위를 수입하기로 미국과 합의했다.
국내 일부단체에서 광우병의 위험에 국민건강을 포기했다는 비난공세가 제기되고 있지만 캐나다, 멕시코,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많은 국가들이 한국보다 앞서 같은 조건으로 미국 쇠고기 수입조건을 개정한 것을 보면, 한국만 검역주권을 포기한 터무니없는 합의를 한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미국 쇠고기, 호주 쇠고기, 뉴질랜드 쇠고기들로부터 한우 농가를 지켜내려는 시도라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한국의 쇠고기 가격은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비싸다. 한국 소비자들은 더 이상 봉이 되고 싶지 않다. 쇠고기 원산지 표기를 확대하고, 유통과정을 투명화시켜서 소비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대로 확보해 주는 것이 정부의 중요한 과제로 부각된다.
여전히 미국의 일부 정치인들은 자동차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쇠고기 합의에 따라 미국 행정부는 이제는 적극적으로 의회비준을 본격화할 전망이다. 그동안 장외에서 머물러 있던 미국축산협회가 강력한 비준 지지자로 선회한 것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혹시라도 한국 국회가 미국 의회보다 먼저 비준안을 처리하는 것이 ‘대미종속’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전략적인 사고의 부족과 다름없다.

공을 넘기지 말고 결자해지하는 자세가 필요할 때

한국 국회가 먼저 비준동의안을 처리하여 미국 의회를 압박하는 것이 전략적인 자주외교이다. 한미관계의 복원, 공고화를 원하는 미국으로서는 한국이 먼저 FTA 비준을 했다는 것이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한미 간의 신뢰회복, 포괄적 전략동맹에 시동을 거는 미국에게, NAFTA 이후 최대의 무역협정을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는 없다는 안팎의 곱지 않은 시선은 분명 부담이 될 것이다.
한미 FTA 비준동의안이 17대 국회에서 처리가 안 되면, 공은 18대 국회로 넘어간다. 여당의 다수당이 된 18대 국회에서 비준안은 통과되겠지만, 비준동의안을 다시 제출하여야 하고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등 행정비용이 만만치 않다. 지난 정권에서 시작된 협정을 결자해지하는 자세가 역사와 국민 앞에 당당하지 않을까. 17대 국회가 훗날 역사에 어떻게 기억될지는 그들의 선택이다.

- 이상은 월간 전경련 2008년 5월호 [초점] 에 게재된 글입니다.